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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헌의 관광 시론] 껍데기만 커진 관광, ‘보고서의 함정’에서 깨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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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헌 교수 / 영산대 관광컨벤션학과
김기헌 교수 / 영산대 관광컨벤션학과

강의실에서 관광학과 학생들에게 최신 정책 트렌드를 가르치다가 문득 멈칫할 때가 있다. 40여 년 전, 내가 관광 현장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읽었던 연구 보고서의 논리와 최신 용역보고서의 핵심내용이 소름 끼치도록 닮아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인공지능이 방대한 데이터를 실시간 요리하며 변화의 속도를 높여가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의 관광정책은 십수년 전의 낡은 문법을 고수하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가. 이제 관광보고서의 마침표는 책상이 아닌, 현장 변화의 시작점에서 다시 찍어야 한다.

요즘 우리 관광업계는 표면적으로 희망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듯 보인다. 외래관광객의 가파른 증가세가 수치로 증명되고 업계 전반에 팽창의 기운이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관광은 덩치만 커졌을 뿐, 산업을 움직이는 심장과 그 미래를 지탱할 본질적 가치를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다. 본래 관광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사람이 이동하는 현상이 아니라, 낯선 이들이 지역의 일상과 조우하며 서로의 삶에 활력을 나누는 연결의 과정이다. 또한, 지역 고유의 색깔을 보존하면서도 그 가치를 외부에 공유하여 경제적 자생력을 키우는 활력의 동력이자, 단기적인 수익을 넘어 한국의 품격을 세계인과 나누는 공유의 철학이 담겨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 곳에도 이런 진심 어린 조우나 지역과 상생하는 깊은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외형이라는 신기루 뒤에 숨겨진 이 뼈아픈 현실은, 오랜 기간 현장을 지켜온 전문가로서 감당하기 힘든 무게로 다가온다.

최근 마주한 ‘표지만 다른 보고서, 한국 마이스 정책을 멈추게 하다’라는 글은 그간 내가 품어왔던 정책 생태계의 본질 상실에 대한 깊은 우려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산업 현장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기묘한 데자뷔를 경험한다. 매년 발간되는 수많은 정책, 연구 보고서는 표지와 연도만 다를 뿐, 논리구조나 권고사항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진단은 새롭지 않고 실행은 더디며, 그 사이 귀한 예산만 소진된다. 이는 정책 생산 생태계의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일부 학계와 연구원 중심의 폐쇄적인 구조가 정책의 언어를 독점하고, 현장의 생생한 경험보다는 이론 중심의 요식 행위가 방향을 결정짓는 현실이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우리 관광 정책의 허리는 무겁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의무처럼 발주하는 중장기 전략 보고서는 발주 기관의 실적을 증명하거나 국책 사업 수행을 위한 기술적 도구로 이용될 때가 많다. 연구자와 발주 기관, 기업까지 얽혀있는 이 카르텔 속에서 학자적 양심은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신규 사업을 위해 수천만 원을 들여 제출된 보고서가 짜깁기로 점철되어 ‘보기 싫으니 책장에 꽂아두라’는 지시를 받았던 과거의 참담한 경험은, 여전히 우리 산업의 부끄러운 민낯으로 남아 있다.

이제 세상은 투명해졌다. 인공지능이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검증하는 초가속화의 시대를 살면서도, 여전히 5년, 10년 단위의 시대착오적인 중장기 전략에 목숨을 거는 행태는 재고되어야 한다. 데이터의 가용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지금, 관행을 답습하는 거대 용역은 사치이자 낭비다. 이제 서류 속 숫자를 나열하며 예산을 따내기 위한 부정직한 보고서 양산을 멈춰야 한다. 베끼기, 과장하기, 본질 흐리기 등 오도된 보고서들은 우리 산업의 미래를 갉아먹는 주범이다.

이제는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발주자는 전문성을 갖추고 주도적인 정책 의지를 확고히 하며, 형식적인 용역 발주라는 구습을 끊어내야 한다. 연구자는 연구 윤리를 지키며 이 보고서가 현장에 어떤 실질적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절실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상적인 모델은 실무자가 현장의 열정과 필요를 바탕으로 전문성을 발휘하는 구조다. 데이터와 인공지능 전문가 등 핵심 인력 한두 명만 제대로 지휘해도, 훨씬 효율적이고 현장에 적합한 진짜 보고서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도래했다. 용역 의존도를 낮추고 실무 중심의 연구 거버넌스로 전환해야 한다.

진정한 보고서는 책상이 아닌 현장에서 탄생한다. 겉만 화려한 뻔한 보고서가 아니라 여행자의 불편을 즉각 개선하고 지역 경제에 온기를 불어넣는 실천적 대안이 담겨야 한다. 학자들은 교실을 벗어나 현장의 역동성을 읽어야 하며, 관은 서류 속 통계가 아닌 여행자의 반응에 수시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교육 현장 역시 프로젝트 수주를 위해 학생을 방치하는 풍토를 타파하고, 진정한 산업의 미래를 고민하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데 학자적 양심을 걸어야 한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성적인 구호가 아니라 산업을 재설계하는 냉철한 실무주의다. 인공지능의 통찰력으로 현장의 불편함을 핀셋처럼 제거하고,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결정으로 지역 경제의 혈류를 뚫어내는 현장형 정책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나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이론 전문가가 되기 전, 먼저 현장을 읽는 데이터 분석가가 되라고 주문한다. 수억 원의 용역비를 들여 5년 뒤의 미래를 예언하려 애쓰지 말고, 지금 당장 여행객이 겪는 불편을 해결하고 지역 소상공인의 매출을 올리는 즉각적인 실천에 집중하라고 강조한다.

용역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정책의 무게를 덜어내고 그 빈자리를 현장의 생생한 실천으로 채워야 한다. 보고서 페이지 수를 늘리는 것보다 여행자의 체류 시간을 10분 더 늘리는 것이, 화려한 슬로건보다 지역 골목의 온도를 1도 높이는 것이 훨씬 더 진정한 관광 정책이다. 우리는 이제 정책을 생산하는 관광전문가가 아니라, 현장을 증명하는 실천가로서 대한민국 관광의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한다. 책장을 묵묵히 지키고 있던 보고서의 시대는 이제 퇴장할 시간이다. 지금부터는 현장의 발소리가 곧 관광정책이 되는, 거침없는 실행의 시대를 열어 나가야할 것이다.


출처 : 여행신문(https://www.traveltimes.co.kr/news/articleLis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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